햇바다 4화 中
한 순간 심장이 멎어버릴 만큼. 눈부신 여명과 함께 엔딩 스크롤이 올라가던 날. 서로의 얼굴을 확인하고 얼싸 안으며 세상은 살아있음에 기뻐했다.
그들은 강했다. 다시 일어난 사람들은 부서지고 엉켰던 세상을 부지런히 정리했다. 명부, 체계, 게임과 수호대는 무너진 터전과 함께 차곡차곡 이전의 모습을 되찾았다. 바뀐 모습도 많았다. 다신 놓지 않겠노라 서로의 손을 꼬옥 잡고, 미처 전하지 못한 사과와 용서를 하고, 여행을 떠나볼 여유를 알았다. 이제껏 그들을 막아선 벽을 사람들은 다시 한번 부수고 고쳐나갔다. 진정으로 원하는 바를 찾아냈으니 주저할 것이 없다. 다만 정갈하게 드러나는 것은 그뿐만이 아니라.
이따금 사람들은 무겁게 발을 멈췄다. 한데 뭉쳐졌을 때의 장면을 사람들은 기억하고 있었다. 역사와 죽음의 실체가 드러났다. 신화다. 대재앙이다. 영문을 알 수 없어 상상으로 덧대고 과장하고 그려온, 어떤 금요일 중 하나는. 이따금 멈춰 서 오래 응시할 만큼 처참한 몰골이었다. 그래서 대홍수가 터진 것처럼, 머지않아 세상은 물 밀리듯 후유증에 시달린다. 여자 또한 마찬가지였다. 퍼블리는 홍수의 한 가운데, 위태롭게 버티고 선 그들의 유산이었다.
'좋은 말만 들을 수는 없을 것이다.' 그의 말이 맞았다. 세상이 정리 되니 분노하는 자와, 옹호하는 자, 이해하되 합리화하지 않는 자가 나왔다. 병원, 길거리, 임시 주거지와 일터에서. 사람들은 그 주제를 눈에 띄게 꺼리다가도 저마다의 의견을 풀어 흥분했다. 힘든 삶에 쌓인 탓을 돌려 화를 풀고, 애탄하기도, 그러다가도 살아남음에 유대했다. 그 결말은 언제나 같았다. 모두 정리 된 일이란 걸 깨닫고, 갈 곳 잃은 연민과 분노는 마무리되지 못한 채 사그라든다. 역사서에는 객관적인 사실만이 담겼다.
'넘버원인 컨티뉴는 그의 과오에 희생했으며, 검은 금요일의 검은 존재는 AAA와 GM이라 불린 주인공이다.'
그 앞에 묵묵히 서서, 퍼블리 셔라는 여자는 덤덤히 역사를 보았다. 그의 뒤에는 언제나 군중이 서있었다. 무거운 침묵이 감돌았다. 평가하지 않고, 재단하지 않고, 손가락 한 가닥 올리지 않고. 단지 시선만 오가는 속에서. 모두가 잘 알고 있었다. 퍼블리는 죄가 없다. 단지 아무것도 모른 채로 그들의 손에 길러졌을 뿐. 순수한 연좌제도 죄로써 이익만을 받았을 때의 얘기. 고스란히 책임을 물려받기에는, 그는 잃은 것이 너무나 많다. 퍼블리 또한 잘 알고 있었다. 그는 죄가 없다. 누군가의 죽음 위에, 그는 비교적 사람으로 자랐다는 사실을 뒤늦게 알고, 사람으로서 가슴이 곪아갈 뿐. 그러니 무르지도, 함부로 나서지도 못하는 때였다.
'괜찮아, 네 탓이 아니야. 책임 지지 마.'
하는 소리가 그의 귓가에 들려왔다. 고심하고 앓아서 힘들게 꺼낸 상냥한 웃음 섞인 말이었다. 순간 우르르, 캄캄한 하늘이 깨져 무너지는 듯한 기분이 들었다. 무겁게 돌아 본 목소리는 퍼블리의 사정을 다 아는 고전부서의 동료도 전에 알던 사람도 아니었다. 그는 그저 얼굴을 모르는 군중 속 하나다. 제대로 죄 지은 사람은 없고 다같이 아플 뿐인 사람 간의. 미묘한 죄책과 또한 미묘한 용서. 평가하지 않고 재단하지 않고 손가락 하나 없이 단지 사람과 사람 간의 시선이 오가고서. 그제서야 퍼블리는 제가 바보같이 멈춰있었음을 깨달았다. 온 몸이 벅찼다.
책임져야 한다. 죄 지은 것도 없다. 다만 살아남아 온전히 길러졌다. 그 이유 하나로 책임감을 느끼고 싶고 느껴야 한다 믿는다. 책임질 필요 없다고 책임지지 말라 붙들고 말려도. 과연 말 안 듣는 전적 만큼은 확실한 그였다. 책임져야만 한다. '게임 마스터의 딸이자 고스톱 마스터의 제자' 라고 누구도 아닌 제가 칭했으니. 수많은 사람들이 용기 내서 용서했다. 그라고 용기 내서 웃지 않을 이유가 없으니.
더 밝은 웃음으로 화답하고 여자는 일어섰다. 삼키고 웃으면 밝아질 거다, 라는 굵직한 믿음 하나가 맺힌다. 물에 물을 맞댄듯 더 크게 작용한다. 냇물과 냇물이 모여 바다로 향하는 건 당연하다. 이제 퍼블리는 밀려든 홍수를 밀어 내보내는데 열중했다. 최선을 다했다. 성과를 이뤘다. 이윽고 이름 딴 부서의 명찰을 달았다. 모두가 그를 영웅이라 칭송한다.
사랑을 베풀면... 사람들은 사랑으로 화답한다. 퍼블리는 그것이 옳다고 생각했다. 그가 움직이고 순환시키는 모든 것이 옳다고 믿었다. 사람들을 움직일 수만 있다면 제 한 몸 아끼지 않아도 됐다. 하지만 그것이 문제였을까?
간과한 것.
올린 입꼬리도, 쉴 틈 없는 몸도, 부서졌다 끼워 맞춘 정신도 모두 오래가지 못한다는 것을. 바르르 약진하는 미소가 점점 힘에 부치는 것을 느꼈다. 거울을 보면 악바리로 짓는 웃음이 가끔은 흉측했다. 혼자서는 힘들다 느끼면서도, 혼자 해내지 않음 안 된다 생각했다. 쉼 없이 뛰었다. 도망치는 꼴로 뛰었다. 그만 두지 못했다. 왜 제가 이렇게 떼를 쓰는지. 매섭게 눈을 돌렸지만. 퍼블리는 사실 알고 있었다.
여명이 밝아오는 세상에 저 혼자 타들며 그저. 누구에게도 말 못할, 어쩌면 기만이나 모욕에 가까운, 어린애 투정에 불과한 이유는 단지 그뿐이었다. 패치, 그리고 모두들. 있잖아요. 사실 솔직히. 철딱서니 없고 어린애 티를 못 벗은 나는요. 주제넘고 괘씸하게도. 조금, 그랬어요. 삭막하게 읊조리지도 못하는.
아저씨가 보고 싶다.
그래서 너무 미안해.
활짝 웃은 낯이 비틀댔다. 홍수가 빠져나간다. 배를 밀어야 한다. 주변의 누구에게도 말 못할 고민은 차라리 혀를 잘라버리는 것이 낫다. 의식하지도 못하고 퍼블리는 외웠다.
생각 나지 않을 만큼 삼키고 웃자.
비정상적으로 웃고 사람들을 돕자.
위로하고 사과를 되풀자.
퍼블리는 발을 뻗었고.
쿠당탕, 소리가 난 동시에 번쩍 눈이 뜨였다.
"...."
순간 눈 앞이 보이지 않을 정도로. 하얀 햇살이 방안을 가득 채웠다. 열린 창으로 든 바람에 얇은 커튼이 살랑 흔들린다. 그 위로 윙윙 팬 돌아가는 소리가 울렸다. 머리통이 가벼운 듯 무겁다. 입에 문 머리카락을 투 뱉고 퍼블리는 느지막이 생각했다. 저게 뭐더라. 어 맞다, 바로크 문양이지. 현장에서 눈 빠져라 외웠었는데. 익숙한 무늬는 아니었다. 그래서 퍼뜩. 깜빡임도 없이 한참을 노려보던 퍼블리가 돌연 발작했다.
이게 뭔 상황이던가. 어지러운 바로크 천장과 함께 바닥에 널부러진 그의 기억이 되살아났다. 수많은 정보들이 삽시간 뇌주름을 침투해 헤집어놓았다. 납치 당했고 초콜릿에 취했고 침대에서 굴러 떨어졌다.
햇바다 6화 中
가장 중요한 것을 알고나니 차근히 순서가 정해졌다. 어렸던 그도 알고있던 간단한 사실인데 잊고있었다.
하나 더 웃게 만들 수만 있으면 그걸로 좋다. 누구 하나 빠짐없이 행복할 매뉴얼을 만들고 싶다. 헛된 꿈이라도 괜찮았다. 허무맹랑하고 무모한 이상론이어도 괜찮았다. 해내지 못할거라 수군댔던 수호대도 공 던지기도 마법처럼 해냈으니. 그는 앞으로 못할 것이 없었다.
커다란 하나의 원칙으로만 뭉뚱그레 돌입하면 소수의 작고 작은 사람들은 고통 받았다. 세부적이고 정교한 체계와 규칙들이 필요하다. 예산과 시간, 노동력이 많이 들어도 당장이 어렵지, 오래되어 관습이 되면 수월해지기 마련이라. 한시 빨리, 그렇다고 무턱대고 놓치는 건 없게 고심해서, 융통성마저 체계라는 우리 안에 있도록 만들었다.
내가 할 수 있을까. … 아무렴. 패치는 자연스레 떠오르는 사람에 눈을 감고, 차라리 외웠다. 그가 할 수 있어야 한다.
그리고 곧, 수호대에 사선으로 찍힌 매뉴얼이 배부되었다. 한바탕 견고히 틀에 잡힌 개혁이었다.
패치의 감독 하에 한창 부서개편이 마무리될 때, 하나 더 좋은 소식이 들려왔다. 패치는 그것을 전해듣고 제 일인 것처럼 웃었다.
용검전설과 타이트니스, 데몬갓챠와 파이터스 퓨리, 그리고 19금부서의 알려지지 않은 게임까지. 그들의 두 번째 검은 금요일에서의 활약을 알고나서, 수호대 인사팀은 인디게임에 관심을 가졌다. 어떻게든 매수할 방법을 찾던 예전의 방식은 접어서 버렸다. 새로운 시선이 필요했던 이들은 수호대 입사시험에 관련 질문을 주관식으로 끼워넣었다. 그리고 부서개편을 앞두고 인사팀은 눈에 띄던 답변 하나를 기억해냈다.
간당간당하게 합격할 정도로 많은 문제를 틀렸지만 한 문항 만큼은 영리했던 답안지였다. 답변은 모든 게임을 지키는 것이 수호대의 본질입니다. 로 시작했다. 고전게임부서를 비롯한 인디게임의 실황을 제대로 파악하고 있었다. 인디게임의 사업실패 원인으로 '자체적으로는 역부족이었던 홍보와 자금난'이 있다 답했으며, 그에 따른 주인공의 유입 하락과 오랜시간의 고립이 내부 분란을 일으킨다 짚었다. 그 예로 수호대가 떠나고 자립한 고전게임부서가 있었다. 하지만 독립할 만큼 훌륭한 사업 아이디어와 운영능력을 내세우며, 수호대가 인디게임과 '조화'를 이룬다면 두 측에 이익이 될 거라 주장했다. 주인공 뒤에서만이 아니라, 먼저 다가가 게임의 홍보와 배급. 인디게임 말고도 모든 게임계에 도움이 될 탁월한 구상이었다.
인사팀은 그 답변을 그대로 채택했다. 부서명은 어떻게 할까요? 인사팀은 답안지에 쓰인 이름을 땄다. 퍼블리싱. 이어서 게임을 수호해갈 영웅에 대한 우대였다.
햇바다 9화 中
밤이 다 아쉬울 정도로 할 얘기가 많았다. 대화가 너무 즐거워서, 맥주를 출렁이며 부딪히는 것도 잊고 잔은 테이블에 붙어버린 지 오래였다. 갓등 하나만 켜진 캄캄하고 단란한 분위기의 술집. 조명 아래 앉은 두 사람은 오래된 친우처럼 보였다.
옛 이야기를 하고 왁자지껄 웃던 이들의 흐느낌이 잦아들었다. 그러곤 잠시, 조용한 적막이 술집에 깔렸다. 곧 남자는 벗어둔 외투를 집고 일어날 준비를 했다.
"오늘 정말 즐거웠네."
"자네."
떠나려는 남자의 손이 붙잡혔다. 두 손에 실린 힘은 따듯하고, 다정했다. 남자의 말끝이 떨렸다.
"… 정말, 이걸로 괜찮겠나."
오랜 친우의 눈동자가 떨리고 있었다. 그 흔들림을 내려보다가 잠시 고개를 숙이고 생각한 크레인은 남자의 손을 빼내 다시 마주 잡았다.
"당신도 꿈을 이뤘고, 그 자도 이뤘다."
마주잡은 손 안에서 바스러지는 감촉에 오마케는 손을 내려다 보았다. 지폐였다. 자신은 공짜에도 예우받지 않을 거라고 젊은 시절 약속한 대로였다. 그 돈을 그저 허전히 바라보고 오마케는 고개를 들었다. 크레인은 웃는 것처럼 보였다.
"이게 내가 바란 세상이오."
코트를 갖춰입고 나선 문에서 딸랑 현관종이 부딪혔다. 새 나오는 입김을 바라보며 날이 추운 걸 알았다. 재판을 받기 전, 마지막으로 찾아간 오마케의 술집에서 담소를 나눈 날. 눈이라도 오려는 듯 흐린 하늘을 올려보며 크레인은 생각했다. 모두에게 동등한 정의로운 세계가 드디어 왔다. 다만,
산 사람이 많아야 하는데, 귀신이 많다.
두 번째 검은 금요일이 일어난 지 약 반년. 무너진 건물들을 어느 정도 다시 세우고나서 사람들은 차차 사회를 정리하기 시작했다. 이사 세 명을 죽인 크레인은 제 의지대로 처벌을 받고 감옥에 갇혔다. 수호대원 하나를 죽인 헥소미노 또한 정상화한 타이트니스를 그의 아들에게 물려준 뒤 처벌 받았다. 사람과 사람 간의 관계가 알려지고 문서로 작성되기 시작한 때. 어느덧 차례가 다가와, 무토의 재판 날이었다.
"영웅들이 왜 심판을 받아야 하는지 이해가 안 가는데."
페르스토는 조소하면서 멀리까지 들리라는 듯 부러 크게 말했다. 그렇게 말하는 비웃음에는 약간의 울분과 서러움, 부아도 섞여있었다. 이 상황이 머리로는 이해되지만 마음으로는 따라가지 못했다. 따라가고 싶지 않았다. 벼랑에 버티고 선 기분으로 페르스토는 크게 떠들었다.
"선하려고 노력한 사람들이에요. 있는 거라도 지키려고 노력한 사람들이에요. 그런 사람들한테 책임을 물어도 되는 겁니까? 그렇게 인도적이지도 않아서-"
말하다가, 남자는 끝내 잇지 못하고 말을 삼켰다. 삼킨 말이 불덩이처럼 목을 할퀴고 달궜다. 그도 알고있다. 너무 잘 알고 있어서 눈시울이 붉다. 사람을 죽인다는 것은 그런 것이었다. 아무리 선한 사람이었대도, 아무리 우발적이었대도. 돌아올 수 없어서 돌이킬 수 없다.
"선하고 강한 사람들은, 법 앞에 서길 무서워하지 않아요. 떳떳하지 못한 사람은, 자신이 악함을 알고 있어 겁먹는 거고요. …그래서 도망치는 거고, 저는 도망치지 않아요."
모두가 안전하기 위해선 어느 하나 빼놓지 않고 선해야 하는 법. 실수가 없고, 선택적이지 않고, 한순간 감정적이지 않고. 선에는 모순이 없어야 한다는 점이 각박하지만 그게 맞았다. 지리멸렬하게 고민하고 갈고 닦고 결코 포기하지 않으니까 선이 강한 거라고. 그렇게 말하면서, 무토는 힘겹게 웃었다.
"이게 맞아요."
페르스토는 그렇게 말하는 여자의 손을 바라봤다. 마주잡은 손으로 미세한 떨림이 전해졌다. 그럼 페르스토는 조금 더 힘을 주어 잡으면서, 그런 생각을 하게 되는 것이다.
내가 죽일 걸.
손모가지도 발모가지도 다 날려도 괜찮은 미친 내가 그럴 걸.
언제나 계속해서 더럽히는 건 내 손이어야 했는데.
페르스토가 뒤늦게 자책하며 입술을 씹었다. 모두 무토가 선한 사람인 탓이었다. 옳은 일을 했다고 믿으면서도 끔찍함은 사라지지 않는다. 매일 밤 무토는 악몽을 꾸었다. 꿈 속에서 남자를 먹고 또 다시 후회하고 흠뻑 땀에 젖어 일어난 그는. 함께 놀라 일어난 페르스토에게 매번 이렇게 말하곤 했다.
-사람들을 지키기 위해서면, 나는 똑같이 했을 거예요.
선고의 시간이 왔다. 무토는 마땅히 벌 받기 위해 눈을 감았다.
“... 상대가 무력화된 시점에 가한 살인이었지만. 게임 내 범죄행위에 대한 수호대의 책임 사실, 피고의 과거 선행들과 개선 여지를 알리는 주민들의 탄원. 오랜 시간 비인도적으로 구금된 것과 더불어, 상황의 심각함과 그에 따른 정신 상태를 참작해 8개월 집행유예를 선고한다.”